시(詩) 좋아하시나요?
거울에 심장을 비춘 듯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시를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시를 잘 모릅니다.
물론 다른 이들보다는 시를 많이 알 수도 있을 듯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르는 시인도 제법 많이 알고 시 몇 편은 읊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미술이나 음악 그리고 수학은 거의 백치에 가깝지만 시는 그보단 나은 수준 정도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제게 시인은 할인마트에 진열된 인스턴트 식품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시 역시 청과물 시장에 있는 감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왜냐? 시란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예술적이지 않을 뿐더러 예술에 대한 정의 역시 인정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제가 동의한 이데올로기도 시를 영혼 운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 그런 제가 시를 읊었습니다. 물론 소리를 내진 않았습니다. 입안에서 옹알거렸을 뿐 입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빙판 위의 요정에게 방해라도 될까봐 소리를 높일 수 없었습니다.
김연아. 잘 아시죠.
제 어머니는 김연아가 점프를 하다가 넘어지면 "애기가 저 차가운 얼음에 떨어지면 얼마나 차갑겠노"하며 소스라치게 놀라십니다. 제 아는 분은 김연아를 보면 "귀엽고 깜찍한 게 우리 집 막내를 보는 것 같아 좋다"고 하십니다. 다른 분은 "어린 나이에 추운데서 고생이 많다"고 걱정을 하십니다. 그분들은 저울에 올린 듯 공평하게 김연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분들입니다. 피겨스케이팅이 무엇인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그 분들은 그런 걱정을 하십니다.
이번에 김연아 기사를 쓰며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피겨스케이팅을 잘 알고 빙판의 차가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들의 가족 가운데 그만한 딸이 있을 게 분명한 어떤 분들은‘왜 그럴까’하고 말입니다.
지난해부터 피겨스케이팅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눈 온 밭에 버려진 하얀색 색종이처럼 눈에 띄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마 왠만한 피겨스케이팅 팬과 지식의 경중을 잰다면 저는 그분들께 고개를 숙여야 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제가 아는 건 피겨스케이팅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운동인가 입니다.
올해 피겨스케이터 김나영을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무척 추운 날이었습니다. 게다가 태릉에 있는 국가대표 훈련장은 너무 추워서 아이스박스에 들어온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히터를 켜려는 선수들에게 관리자는 "기름값을 아껴야 한다"며 핀잔을 주더군요. 그곳에서 나영이와 다른 피겨스케이터들이 옷을 껴입은 채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담배를 끊으려 노력하고 있던 참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사진기자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담배 있으면 한대만 주지 않겠어."
두꺼운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있는 제가 미안해지더군요. 물론 감정의 과잉일 수 있었습니다. 자기 좋다고 하는 피겨스케이팅이고 국가대표이니 그 만한 어려움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취재를 해보니 다른 가난한 나라도 발암물질이 풍기는 아이스링크에 난방도 끈 채 선수들을 몰아세우진 않더군요.
게다가 국가대표가 태극마크를 달고 나라를 빛내는 존재라고 하지만 국가대표는 선수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스포츠 문화를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국가가 스스로 뽑은 대표선수들을 지원할 의사가 없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의 국가대표가 아니겠지요.
당시 선수들은 예상 외로 하나같이 연아를 칭찬했습니다. 누구하나 시샘하거나 배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선수들의 부모들도 연아의 성공을 자식의 성공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분들은 오히려 엄청난 고생을 한 연아 어머니를 자신의 일처럼 격려했고 때로는 자신의 고생담을 들춰낸 것처럼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간혹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연아 엄마 너무 극성 아니야?" "연아가 아마추어치고는 너무 상업적이지 않아?"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분들께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요.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자식의 인생을 위해 부모가 희생하는 것을 극성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극성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극성이 아니어도 될 만한 환경을 조성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아마추어 선수가 19세기 가난한 예술가처럼 빈곤과 가난에 시달려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상업적이라는 지적은 맞습니다. 그러나 상업적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제대로 연습할 곳 하나 없는 국내 피겨스케이팅의 현실을 직시하는 건 어떨까요. 대관사업에 눈이 먼 빙상계가 목동아이스링크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눈여겨보는 건 어떨까요. 어렵게 대관한 아이스링크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연습해야 하는 이 나라 피겨스케이팅의 현실을 바로 보는 건 또 어떨까요.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이 나라라고 푸념하신다면 돈이 없으면 빙판을 떠나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나라입니다."
잘 아는 광고기획자가 그러더군요. "김연아 정도의 상품이라면 벌써 수십억 원을 벌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연아가 무리하게 광고에 등장하는 법은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연아가 건강하게 제 할일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할 게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에 가면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광고에 등장합니다. 광고라는 것이 제 사회의 유행을 선도하는 트랜드 리더라고 규정할 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국내 스포츠 스타들이 광고에 등장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없지요. 없습니다.
박태환, 김연아 이전에 누가 있었습니까. 이 어린 친구들에게 꼽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 전에 드디어 스포츠 스타도 광고에 등장하게 됐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이 이 나라 스포츠에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연아 어머니 박미희씨와 잠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가슴이 예리한 송곳으로 찔린 듯 아팠습니다. "제게 묻지 말아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연아 어머니가 왜 그런 말씀을 했는지 되묻지 않아도 충분히 알 일입니다. 기자인 저 먼저 반성할 일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혹시 나는 김연아를 스포츠 선수가 아닌 상품으로 대하지 않았나.' '김연아의 점프에만 집중했지 그가 빙판에 흘렸을 땀은 지나치지 않았나.'
그러나 무엇보다 제 가슴을 아프게 한 건 연아 어머니를 보며 제 어머니를 떠올린 것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야구경기를 마치고 학부모들이 모인 적이 있었습니다. 일하시다가 뛰어오신 어머니가 한쪽 구석에 계셨습니다. 제가 주전이었고 그날 경기도 잘해 다른 부모님들이 칭찬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저 먼 곳에서 흐뭇한 미소로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더 나이를 먹고서야 알았습니다.
제 어머니는 일때문에 경기를 거의 못 보러오셨고 다른 부모들처럼 큰 돈을 내지도 못하셨습니다. 혹여 아들이 다른 이들에게 능력과 상관없이 당신때문에 욕을 먹거나 비판받을까봐...그래서 제게 다가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연아 어머니도 같은 마음이셨을 테지요.
오늘 그냥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어제가 제 어머니 생신이기도 하셨고요. 간혹 저를 가리켜 냉철(좋게 말하면)하거나 냉혹(나쁘게 말하면)한 기자라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 딴에 불의에 대한 침묵은 사회를 상대로 한 자해라고 생각해 비판에 인색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만 사실 어설픈 정의는 진실을 호도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실제로 그랬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제가 냉철 혹은 냉혹하지 못하게 다소 감성적으로 썼다고 비난하지 말아주세요.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이런 말을 적을 곳도 제 블로그가 유일합니다. 제가 감성적이어도 비난받지 않을 유일한 곳 역시 이 블로그입니다. 기자 박동희가 아닌 개인 박동희의 생각을 적은 것이니 너무 야단치지 말아주세요.
제가 좋아하는 분의 블로그 대문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동의할 때마다 내가 틀렸다는 느낌이 든다 -오스카 와일드’
제가 제 블로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서는 제가 뭔가 잘못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ps. 간혹 제 이메일로‘김연아와 아사다 마오를 비교해 누가 좋은 선수인지 입장을 말해 달라’든가 아사다 마오와 김연아의 국적을 들어 두 선수를 평가하는 글이 오기도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제 입장을 정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연아에게 배운 것입니다. 언론에서 연아와 마오를 비교하기 바쁠 때 연아는 "마오는 좋은 친구"라고 하더군요. 거위의 꿈님께도 배웠습니다. 그는 제게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단 한줄의 글로 일깨워줬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습니다.
“우리 두 선수의 국적이나 피부색은 뒤로 하고 그들의 스.케.이.트.날에만 집중합시다"라고. "둘 가운데 한명이 넘어지면 손을 뻗어 일으켜 주고 그 가운데 한명이 멋진 승리를 하면 박수를 쳐주자"고.
마지막으로 제가 연아의 연습장면을 보며 조용하게 읊은 시를 적도록 하겠습니다.
<사랑> 김남주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를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
연아경기를 보며 우리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요...
'*Yuna Kim♥'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보# ELLE 엘르 2009년 6월호 Yuna Kim (0) | 2009.05.21 |
---|---|
기사# 얼루어 코리아 2009년 6월호 Yuna Kim (0) | 2009.05.19 |
기사♥ "연아 가는 곳에 우리도..." 승냥이를 아시나요? (0) | 2009.04.08 |
기사# 더뮤지컬 2009년 3월호+여성조선 2009년 3월호 (0) | 2009.03.12 |
기사♥ 애매한 판정에 속 끓은 '피겨퀸' (0) | 2008.11.06 |
이벤트인증♥ 2008 연아갤 생일선물 (0) | 2008.09.05 |
기사# 코스모폴리탄 2007. 9월호-열일곱살 소녀가 발하는 우아한 카리스마 (0) | 2007.08.21 |
정보♥ 김연아와 배워보는 피겨 점프 2 (0) | 2007.04.17 |
정보♥ 김연아와 배워보는 피겨 점프 1 (0) | 2007.04.17 |
기타# 박분선의 난 - 왜 명예훼손을 고려하게 되었나. (0) | 2007.01.19 |